고려의 자주성을 수호한 마지막 자존심
-
Column
고려의 자주성을 수호한 마지막 자존심
충북 진천하면, 대개 많은 이가 김유신 장군의 출생지로 기억할 테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고려 시대 무신정권 최후의 집권자이자 몽골의 침략에 맞서 끝까지 싸운 임연(林衍, ?~1270) 장군에 더욱 익숙하다. 이 비운의 영웅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라는 농다리 전설에도 남아 있을 정도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다. 진천의 맑은 정기를 받아 나고 자란 임연 장군은 그야말로 ‘장군감’이었던 모양이다. 한창 몽골군의 침략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 아이였던 그가 동네 친구들과 전쟁놀이를 하는 모습이 대장군 송언상(宋彦祥)의 눈에 띄었는데 지도력이 범상치 않았다. 그길로 발탁돼 휘하에서 학문과 무예를 익히며 지내다가 송 장군이 병사하면서 도로 귀향했으나 시대는 영웅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1234년, 외세의 말발굽이 고향을 짓밟자 마을 청년들을 이끌고 분연히 일어나 물리친 공으로 대정이라는 벼슬에 임명되면서 첫 출사표를 던졌다. 아명이었던 승주(承柱)를 버리고 넓게 뻗어 나가겠다는 포부로 연(衍)이라는 이름을 쓴 것도 이때부터다.
< 임연장군사적비및유물 >
최씨 무신정권과 김준의 폭정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다
임연 장군은 요즘으로 치면 자수성가형으로, 비록 권세가 집안 출신은 아니어도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손수 탄탄대로로 일굴 만큼 특출했다. 무신정권의 막을 연 최씨 가문에서 태어나 집권자의 자리에 앉았으나 민심을 읽지 못하고 정사를 어지럽히다가 죽음을 맞이한 최의(崔竩, ?∼1258)와는 대척에 선 셈이다.
흥미롭게도 최의의 목숨을 거둔 인물이 임 장군을 천거한 김준(金俊, ? ~ 1268)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뜻이 통해 아버지와 아들처럼 지내기도 했다. 또, 함께 최씨 무신정권의 폭정을 막으면서 왕실로부터 인정받았고, 임연 장군은 도령낭장·상장군을 거쳐 추밀원부사에 올랐다. 더불어 향리인 진천은 창의현으로 승격해 현령이 부임하는 경사를 누렸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 않던가.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겠다고 나선 김준도 새로운 무신집권자가 되자 권력의 단맛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원나라에 바치는 예물로 금과 은을 모으기 위해 백성을 수탈하고, 전쟁과 흉년으로 멈춘 국가행사인 팔관회를 열면서 잔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거듭 세금을 징수했다.
권력자 밑의 가신은 더했다. 그 권세에 기댄 고이(高耳)와 문성주(文成柱)가 온갖 수단으로 민초를 못살게 굴자 누군가가 익명으로 어사대에 알렸지만, 위에서 막으니 그만 묻혀버렸다. 또, 문성주는 전라도에서, 지준(池濬)은 충청도에서 농장을 관리하게 했는데 마치 경쟁하듯 가혹하게 착취했다. 볍씨 한 말을 주고 쌀 한 섬을 빼앗을 정도였으니 곳곳에서 원성이 자자했다. 게다가 김준의 아들들은 무뢰배와 어울리며 못된 짓을 일삼았다.
국왕 원종(元宗, 1219~1274)은 이 횡포를 막을 대항마로 임연 장군에 주목했다. 마침 임 장군은 초심을 잃은 김준에게 크게 실망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위기에 빠졌다고 근심하던 터였다. 왕실의 뜻으로 김준 일당을 제거하면서 그는 무인시대의 새로운 집권자로 올라섰다. 덕분에 진천은 의령군으로 또 한 번 승격하는 영광을 누렸다.
< 임연장군 영정과 장렬사 사적비 >
숨을 거둘 때까지 놓지 않은 항전…민초들에게 전설로 남은 정의로운 성품
충정으로 지켜낸 나라의 자주성이 계속해서 지켜졌다면 참으로 뿌듯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원종은 나약한 왕이었다. 몽골제국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르면서 자진해 제후국이 되겠다고 청하기도 했다. 천하를 호령한 고구려의 명맥을 잇는다는 고려의 군주가 스스로 고개를 숙이니 원 세조 쿠빌라이 칸(Kublai Khan, 1214-1294)은 매우 기쁜 나머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고려는 머나먼 나라로, 그 옛날 당 태종이 쳐도 굴복시킬 수 없었던 나라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태자가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원종 이후 고려의 역사는 크게 바뀐다. 왕은 종(宗)이라는 묘호를 쓰지 못하고 원나라로부터 충(忠) 자가 붙은 시호를 받았다. 예를 들어 원종은 충경왕(忠敬王), 그의 아들은 충렬왕(忠烈王)이다. 의미인즉슨 몽골제국에 충성하라는 것이었다. 더불어 왕위에 오르면 무조건 원나라 공주와 혼인해야 했고 간섭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원종은 태자 왕심을 몽골로 보내고, 개경 환도를 추진했다. 일찍이 고려는 원나라에 대항해 맞서 싸우고자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바 있었으니 이제 개경으로 돌아가자는 건 속국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1269년, 임연 장군은 삼별초와 육번도방을 집결하고, 재상들을 모아서 원종 폐위를 천명했다. 또한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왕으로 추대하고 교정별감의 위치에서 적극적으로 반몽정책을 폈다. 그를 공격하기 위해 비겁한 상왕은 몽골군의 막강한 힘을 빌렸다.
결국 4개월 만에 다시 원종이 복위했지만, 임 장군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폐위 사건에 대해 직접 보고하라는 원나라 조정의 기별에 따르지 않고 마지막까지 개경 환도를 반대하면서 치안과 국방을 담당하는 야별초를 각 지역으로 보내 백성들에게 섬을 지키게 했다. 장기전도 불사할 태세였다. 허나 거기까지였다.
오랫동안 나라를 지키며 얻은 피로와 울분이 깊이 쌓인 탓일까. 의지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대세임을 통감해버린 걸까. 1270년 2월, 임연 장군은 등창으로 지친 몸을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원 간섭기가 고려를 덮쳤고, 주지한 바와 같이 왕실은 대대로 수모를 겪어야 했다.
< 진천 농다리 >
영웅은 시간 속으로 사라졌으나 그를 그리워하는 민초들의 애정은 돌다리에 깃들었다. 충북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의 농다리엔 임연 장군이 용마를 타고 하룻밤 만에 돌을 날라 지었다는 전설이 있다. 추운 겨울, 맨다리로 얼음장 같은 물을 건너 친정아버지를 찾아간다는 어느 부인의 효성이 갸륵해 만들었다고. 말을 타고 하늘을 날아 밤새 다리를 놓았다는 이야기가 진실일 리는 없다. 그러나 누군가의 효심에 탄복해 돕겠다고 나선 정의로운 성품은 두고두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외세로부터 나라의 자주성을 지킨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임연 장군에 대한 진천 사람들의 자부심이 천년이라는 세월을 한 자리에서 지킨 농다리처럼 단단하다는 증거다.
사진출처 : 진천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