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관 이야기
새로운 기대와 행복을 주는 공간 어울관(국가인재원 식당) - 백명숙 사무관
공무원은 누구나 식구다
- 1979년 대전 시절 세무공무원교육원과 충남지방공무원교육원을 포함한 급식인원은 중식이 800~1,000명이었고, 아침․저녁은 300~400명 정도였다. 과천으로 이전한 1982년부터는 우리 원의 교육생만 이용하고, 교육대상도 5급 이상이기에 식사인원이 급격히 감소했다. 그래도 점심이 300~350명, 아침․저녁은 100~150명으로 연인원으로 치면 10만~12만식 정도였다.
- 그러나 IMF 이후 1999년부터는 6급 이하 공무원까지도 입교하여 다시 식사인원이 늘게 되었다. 교육일정에 따라 점심은 500~1,000명분을 준비하고, 아침․저녁은 100~180명쯤으로 지금까지 지속되어 연인원으로 치면 15만~20만식 정도가 된다. 그 외 여러 행사에 참여한 인원을 포함하면 35여년간 수발한 식수는 약 500만 식이 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야말로 공무원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국가인재원에서 교육서고 식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무원이면 누구나 식구(食口)다.
구내식당은 짬밥(?)
- 대전 괴정동 시절에는 세무공무원교육원과 충남지방공무원교육원이 같은 경내에 있어서 그 기관 교육생들도 우리 원 후생관(식당)을 이용하였다. 비빔밥, 닭곰탕, 육개장, 곰탕, 갈비탕, 김치찌개, 된장찌개가 주 메뉴였고, 매 주마다 반복이 되었는데 김치류는 깍두기, 배추김치뿐이었다. 아침식사에는 반드시 계란후라이가 메뉴에 들어갔다. 계란이 비교적 귀한 음식인 때라 건강을 배려해서였다.
- 당시만 해도 구내식당 음식은 군대에서 먹던 짬밥(?)정도로 인식되었기 때문인지 큰 불평도 없었고, 나름대로 체계가 잘 잡혀서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매주 반복되는 메뉴는 뻔해서 누구라도 내일 메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준비하는 입장에서 참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어느 날, 이용자 모두에게 식당을 새로운 기대와 행복을 주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고 실천해 보기로 했다. 우선 자장밥, 냉면, 닭볶음탕, 전류 등 메뉴부터 개발을 시도해 보았다. 그런데 늘 같은 음식만을 조리하던 주방에서 먼저 불평이 나왔다. 시설은 여의치 않았고 인력도 부족하였지만 모두의 노력으로 차츰 변화를 시도해 볼 수 있었다.
- 1981년 12월 과천으로 이전하면서 조리원 몇 분이 같이 왔으나, 조리실장이 새로 채용되는 등 조리실 분위가 많이 달라졌다. 한식메뉴 개발은 물론 양식도 조금씩 시도해 보았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점차 메뉴는 다양해 졌고, 1984년 전임 조리실장이 채용되면서 더욱 메뉴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2015년 모호텔 출신의 현 조리실장과 OO그룹, 국회사무처 등 근무경력이 다양한 차석의 충원으로 조금 더 품질이 개선된 것 같다.
- 지금은 국내 일반교육생 식사는 물론이고, 20여 개 국이 넘는 외국공무원과정, 각 교육과정에 따른 행사와 체육대회 후 간식, 외빈접대, 장․차관워크숍 등 정부 주요행사에 따른 오․만찬 등도 치러 내고 있다. 앞으로도 전통음식, 향토음식 등에 대한 더 많은 연구와 외국인연수생들에게 감동을 주기위한 각국의 요리법 습득 등 미진한 부분도 많이 보완해 나갈 예정이다. 한편, 진천 이전 후에는 넓어진 식당 공간을 활용해서 복수식단 급식을 기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울관 거쳐 간 200여명 조리원들
- 1981년까지 대전에서의 조리원은 B.O.Q 식당을 포함해서 14명이었다. 조리원 외 배식, 청소 등 홀(급식장) 관리를 했던 여직원 10명을 포함하면 20명이 넘는 대식구였고 당시 신분은 전원 일용직이었다. 1981년 12월 과천 이전과 동시에 우리 원의 급식만 담당했으므로 조리원들의 숫자가 반으로 줄어든 대신 신분변화가 있었다. 조리실장(현재 전문경력관 나급), 남자조리보조 1명은 고용직으로 전환되었고, 2년쯤 지난 후 홀 관리 여직원 4명도 고용직으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여직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업무를 바꾸거나 결혼 등의 이유로 이직이 많아졌다.
- 결국은 1988년도 들어서 주방의 조리원들이 고용직으로 임용되며 홀 관리까지 담당하게 되고, 조리원들은 책임감을 갖고 참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10여 년 동안 신바람 나게 일하던 조리원들에게 갑자기 IMF가 닥쳤다. 구조조정의 희생양으로 조리원들이 짐을 싸야했다. 마침 위생원 결원이 생긴 국무총리 공관에 겨우 조리원 1명만 전출 보낼 수 있었다. 지금도 당시 나간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 그 와중에도 급식은 지속되야 했기에 일용직으로 새로운 조리원들을 채용했다. 숙련되지 않은데다 신분이 불안한 조리원들이라 이직이 매우 잦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여곡절 끝에 책임감 있고 일 잘하는 조리원들로 구성되어 식당운영은 안정되었고, 특히 조리원 중 3명은 비정규직보호법에 의해 2007년 10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어 안심하고 일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는 공무원 신분인 2명 외에 나머지 6명은 무기계약직이다.
- 돌이켜 보니 지난 35여년 동안 며칠이라도 인연을 맺고 일했던 식당직원은 200여명이 훨씬 넘는 것 같다. 함께 일을 하면서 그들을 위해 과연 얼마나 마음을 써주었나 생각해 보니 한 분, 한 분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주어진 일을 수행하기에 급급해서 무심했던 부분, 친절하지 못했던 부분, 화냈던 순간 등등…
- 어울관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모든 조리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라고 본다.
식대는 얼마나 인상되었을까?
- 1979년 대전 괴정동 시절에는 식대가 300원이었다. 운영담당자는 식비를 올리고 싶은데 교직원의 반발이 심하여 그대로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어떻게 그 돈으로 밥과 반찬을 만드는 지 신기했다. 당시에 라면 한 그릇이 200원~300원 정도였고, 자장면이 400원~500원 정도였다. 비결은 외부식당에 비해 식사인원이 많아서 식재료를 싸게 살 수 있었고, 이익을 창출하지 않아 원가수준에서 식사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 1982년 과천으로 이전한 후 1,000원으로 인상하였는데, 서울에 가까워지면서 식자재 값이 인상된 걸 반영한 것이고, 식사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이듬해인 1983년에 다시 1,500원으로 조정되었고, 이후 1992년에 2,000원, 1996년에 2,500원, 2004년에 3,000원, 2010년 3,500원으로 인상되었고, 식품 가격의 폭등으로 2012년 4,000원으로 또 인상되어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그것도 음식 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최소한의 식비 확보차원에 불과하다.
- 시중에서 라면 한 그릇이 3,000원~4,000원이고, 찌개류를 포함한 한식이 최소한 6,000원~10,000원인 것을 고려하면 우리 식당은 단체급식의 이점을 감안하더라도 가격대비 고품질의 식사라고 볼 수 있다. 위탁운영하는 다른 기관 식당들이 4,000원인 것과 비교해도 그렇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원이 간접적으로 직원과 교육생들의 후생복지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식기는 무엇을 사용해왔고 배식은 어떻게 해왔나?
- 79년 당시 사용했던 사각식판은 누런색의 PVC재질로 군대식 식사를 연상케 했다. 음식을 미리 담아두었다가 내주면서 밥과 국만 떠주는 형식으로 배식했다. 그 후 과천으로 이전할 때 스텐리스 식판으로 바꾸었고, 음식은 미리 담아 두되 따뜻한 반찬은 배식하면서 직접 담아내는 식으로 조금은 진일보 했다.
- 1992년 경에 우리 원에서 관공서 구내식당으로는 처음으로 뷔페식(자율급식)을 채택하여 시행했다. 그런데, 혹시나 입에 맞는 반찬만 많이 가져가서 부족할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할까? 아니면 음식을 많이 담아서 다 먹지 않고 버리지는 않을까? 등등 많은 걱정을 하면서 한 모험이었다. 당시만 해도 뷔페식은 일류 호텔에서만 했을 뿐 아직은 대중화되지 않은 문화였기 때문이다.
- 초기에는 단가가 높은 음식을 통제하면서 담아주기도 하고, 지켜 서 있기도 하는 등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자리를 잡아 갔다. 어떤 분은 좋아하는 음식을 더 달라고 사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배식하던 조리원들도 그런 경우엔 교관들보다 더 어깨가 으쓱해 보였다. 물론 지금은 별 통제가 없는 완전한 뷔페식으로 정착되었다.
- 우려와는 달리 뷔페식은 대성공이었다.이 뷔페식으로 급식을 시도한 몇 년 후, 다른 공무원 교육기관에서도 벤치마킹을 하여 뷔페식으로 거의 바꾸었다고 한다. 사람의 식성과 기호는 다 다르므로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뷔페식 급식은 식사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만들었고, 음식물쓰레기를 줄이는 효과도 컸다.
- 1994년에는 무거운 스텐리스 식판을 뷔페접시로 바꾸었다. 가볍고, 홈이 파이지 않은 평면이라서 때도 타지 않았다. 교육생들은 호텔 뷔페식을 연상하며 환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접시에 반찬국물 등이 섞이는 불만이 나오게 되었고, 탕(국)그릇으로 인한 화상 염려가 있어 2010년부터는 칸 구분이 있는 APC 사각식판을 메뉴에 따라 병행하여 배식하고 있다.
▲ 스텐리스 식판(1994년 이전)
▲ 멜라늄접시와 국 그릇(1994년 이후
▲ APC사각식판과 국 그릇(2010년 이후)
- 한편, 1983년경부터 핵심관리자과정을 비롯하여 말레이시아과정(외국인) 등 과정별로 극기훈련이 있었는데 관악산, 청계산 등산과 함께 이루어지는 교육과정이었다. 하산한 교육생들과 교관단에게 식당직원들을 파견하여 현지에서 가마솥에 장작을 지펴 지은 밥과 미리 준비해 간 국과 반찬을 제공했던 약 10년간의 특별한(?) 배식도 있었다. 또 어울관 앞 파고라 부근에 텐트를 치고 현장직 모범공무원과정, 국가전략세미나 등에 야외 급식을 했던 경우도 있었다.
▲ 말레이시아공무원 극기훈련 후 식사준비
▲ 파고라 주변에서 야외 급식
고객맞춤형 급식의 유래
- 고객맞춤형 급식의 유래: 1980년, 성함은 잊었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호걸 타입 교육생이 한 분 있었다. 특허청에 근무하는 과장님으로 특별정신과정 교육 중이었다. 본인이 채식만 해야 하는 사정이 있으므로 식당에서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편의를 제공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 특별히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야채, 두부, 된장 등을 이용하여 일주일 정도 식사를 마련해 드렸다. 교육기간 중에 내내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인사하셨고, 마주치는 교육담당 직원들마다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작은 수고를 통해서도 교육생들을 기쁘게 할 수 있음을 처음 알았고, 급식서비스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 그래서 그 때부터 지금까지 실시하는 비슷한 제도가 있다. 메뉴에 거부감을 갖는 경우를 대비해서(예를 들면 설렁탕, 삼계탕, 추어탕, 국수 등), 다른 음식 몇 가지 약간씩 준비하여 불편을 덜어주는 일이다. 특히, 신임관리자과정 등 여자교육생의 경우 별도로 준비한 일반메뉴를 간혹 이용한다. 어떤 경우에는 교육 중에 병이 난 여자교육생을 위해 따로 죽을 준비해 주었는데, 굶으려고 생각했다며 너무 고마워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비슷한 일련의 경험을 통해의 고객맞춤형 급식은 확고하게 자리 잡아 나갔다.
외국공무원교육생 눈높이 급식을 위한 노력
- 1984년 처음 말레이시아과정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파라과이 등 중남미, 우즈베키스탄 등 동유럽, 나이지리아 등 아프리카, 러시아 등 20여 개국이 넘는 외국인과정에게 식사를 제공한 것이 어느덧 30년이 되었다.
- 초창기는 외국인에 대한 낯선 느낌은 물론이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식을 혐오하는지 몰라서 매우 난감했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출입하는 식당과 외국인 출입이 비교적 많은 호텔식당 등에 문의를 했고, 강남 테헤란로에 위치한 말레이시안 식당에도 가보았지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 결국 우리 식당에서 식사하는 외국인교육생들이 실험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식사 후 남기지 않은 음식과 남긴 음식의 분량 등을 통해서 기호식품과 혐오식품들을 어렴풋이 파악하게 되었고, 종교에 따라 가리는 음식 종류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 특히 이슬람교도가 많아서 그 쪽 음식은 더욱 연구가 필요했다. 그들은 돼지고기와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햄, 소시지 등)과 알콜이 들어간 음식은 절대 먹지 않았으며, 쇠고기, 닭고기도 할랄의식 이슬람교 율법에 따라 모든 땅위에 고기는 메카를 향해 짐승의 머리를 눕히고 기도를 한 다음 고통을 없애기 위해 단칼에 목을 치고 모든 피를 다 빼는 도축의식을 거친 것을 확인하고서야 먹었다. 그래서 쇠고기, 닭고기는 이태원 이슬람성전 모퉁이에 있는 ‘모슬람 정육점’에서만 구입해야 했다. 할랄의식을 거쳤다는 것 외는 똑같았으나 일반육에 비해 가격이 30~40% 비쌌다.
- 차츰 그 나라 요리 서적을 구입하기도 했고, 해당 국가 대사관을 통해서도 정보와 도움을 받았다. 다행히 인터넷문화의 발달에 따라 정보수집이 조금 더 수월해 졌고, 외국인의 국내 입국이 많아짐에 따라 이태원 등에 생겨난 각국 음식점을 벤치마킹하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인도음식점, 러시아음식점, 남미음식점, 말레이시아·파키스탄·인도네시아인 등을 위한 많은 동남아음식점을 다녀 볼 기회가 있었다.
음식을 통한 교류-작은 외교
- 1992년, 말레이시아 공무원과정 교육생 한 분이 와서, 요리가 취미인데 우리 주방에서 본국의 음식을 만들어 보여도 되겠냐고 했다. 오이와 토마토에 다진 생강, 마늘, 붉은 고추를 넣어 그 나라 고유의 음식을 우리에게 만들어 보였다. 우리나라의 김치역할을 하는 음식인데 김치처럼 발효식품은 아니었다. 아무튼 와이셔츠 소매를 걷고 시종 웃는 얼굴로 음식을 만들어 보이던 그 분의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이후 그 음식은 말레이시아 공무원과정의 단골메뉴가 되었다.
- 1996년에는 우즈베키스탄과정 공무원들이 입국할 때 보드카와 음식재료를 비행기에 함께 가져 와서, 입교 다음 날 우리 주방을 빌려 줄 것을 요청했다. 거의 전원이 참여한 가운데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었는데 아주 즐겁고 흥겹게 콧노래를 불러가며 일했다. 낙천적이고 밝은 국민성을 엿볼 수 있었으며, 옆에서 지켜보던 우리도 즐거웠다. 또한 어느 대학 총장이라는 분은 야채와 양고기 등을 섞어 만든 밥을 열심히 만들었는데 요리법과 맛이 특이했다. 납작하게 썬 토마토 위에 실파 다진 것을 뿌린 음식은 생소했고, 포도와 과일은 우리 것보다 단 맛이 강했다. 2006년에는 말레이시아 대사관의 서기관 한 분이 부인과 처형을 우리 주방에 데려와서 몇 가지 음식을 요리해 보였다. 그 분들에게서 태국 쌀로 불리우는 인디카(Indica)종 쌀에 코코넛밀크를 넣어 밥을 짓는 것과, 쌀국수 볶음요리를 배워서 지금까지 잘 활용하고 있다.
▲ 말련대사관 서기관 부인 일행에게서의 요리 학습
- 인디카종 쌀은 주로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먹는 자포니카(Japonica)종 쌀보다 세계적으로 더 많은 나라가 먹기 때문에 그 밥 짓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 매우 유익했다. 같은 해, 말레이시아과정의 중국계 교육생 한 분이 본인은 집에서 두부를 직접 만들어 먹을 정도로 음식을 만드는 것을 좋아 한다고 하며, 주방에서 몇 가지 음식 시범을 보여주며 가르쳐 주길 자청했다. 그 날 주방 한 쪽에서는 말레이시아과정 다른 교육생 3~4명도 말레이 전통음식을 가르쳐 주었으므로 주방이 북새통을 이루었지만 가르쳐 주고 배우는 즐거움이 더 컸다. 그 중국계 말레이시아 분은 1년 후 전년도 교육동기생 중 8명과 그들 가족 30여명과 함께 우리을 다시 방문하기도 하였다. 한국을 너무 사랑해서 또 왔노라고 웃음지어 보였다. 이처럼 교육과정 중에서 식사는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적 교류를 넘어 국가이미지 제고에 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작은 외교무대가 될 수도 있었다.
외국공무원교육 20주년 기념-홈커밍 행사
- 각국 교육생들이 수료한 지 수 년 또는 이십여 년이 지나서 다시을 방문하면, 서로 반가움에 얼싸안고 눈물까지 흘린다. 행사 내내 뜨거운 감동으로 다들 가슴이 뭉클했다. 행사는 호텔에서 진행되었지만, 우리 식당에서도 오찬을 한 번 제공했더니 교육당시의 추억 때문인지 더욱 감격해 했다.
▲ 홈커밍데이 오찬장(교육원 어울관)
어울관을 다녀간 외부강사
- 우리 원에 강사로 초빙되는 분들 중에는 일반인에게도 많이 알려진 저명인사들이 많다. 정치인, 장․차관 등 고위공직자, 대기업 회장, 가수․코미디언 등 연예인, 종교인, 국악인 등.. 이런 저명인사들 중 어울관에서 식사를 한 분들도 많다. 60세가 넘어도 여전히 열정이 넘쳤던 가수 조영남, 양배추머리로 통했던 코미디언 출신 김병조 교수, 방송을 통해 유명해진 장경동 목사, 코미디 프로 순악질 여사에 출연했던 국악인 신영희, 사물놀이의 독보적 존재인 국악인 김덕수, 새 박사로 유명한 윤무부 교수, 국회의원이었던 소설가 김홍신, 나마스테로 유명한 작가 박범신, 미국과의 쇠고기협상에서 곤욕을 치르셨던 김종훈 본부장, 버시바우 전 주한 미대사, 관광공사 이참사장, 씨름선수 출신 이만기교수, 이규혁 스케이트선수, 사업가 겸 요리사인 백종원 등 지면이 부족할 지경이다. 우리 식당으로서는 큰 영광이었다.
어울관을 다녀간 역대 대통령
- 1984년 전두환대통령과 수행원, 우리 원 간부 등 20여 명이 지금의 외국인식당(당시 편의점)에서 점심식사를 하셨다. 이틀 전에 청와대 경호실에서 몇 분이 점검을 위해 와서, 식당직원을 일렬로 세워 놓고 조리원의 가운과 두발상태, 반지 등 장신구 착용 여부, 청소상태 등 전반적인 사항을 체크했다. 하루 전에는 식재료를 미리 준비하여 별도의 냉장고에 넣고 자물쇠를 채우고 봉인하였다. 혹시 음식재료에 독이라도 들어 갈까봐 그랬을 것이다. 철저한 감독아래 약간의 공포감을 느끼며 음식을 준비하였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전날 검식관의 지시에 따라 쌀알을 손으로 일일이 골랐던 일이다. 쌀알 상태가 깨지지 않고 온전한 것만으로 밥을 지으라는 것인데, 모양이 바르고 좋은 것을 대통령께 드리겠다는 충정 하나만은 감탄(?)할 정도였다.
- 노태우대통령은 오신 적이 없었고, (故)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1월 18일에 ‘경제활력 회복을 위한 고위공직자 대토론회’에 오셨다. 토론회는 이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김 대통령은 이튿날 새벽에 운동장에서 조깅을 하고 난 후 지금의 대식당에서 식사를 하셨다.
▲ 오찬하기 직전의 김영삼 대통령 (1997년)
- 아침식사는 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역시 밥은 드시지 않았고 국만 드셨다. 그 때 대통령께서 장․차관과 함께 줄을 서고 음식을 손수 가져 가며 영양사와 악수도 했다. 식당에서도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 (故)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9월 2일 고위공직자특별연찬회 등 2번 방문하셨고, 그 때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셨다. 평소에 식사를 잘하지 못하셨는데 그 날은 많이 드셨다는 검식관의 말에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 (故)노무현대통령은 2003년 3월 7일에 개최된 장.차관 연찬회 등 임기 중에 6차례 오셨다. 식성이 참 좋으신 편이고, 오실 때마다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다 잘 드셨다. 줄서서 음식을 담으며 갈치조림을 보고 매우 좋아하던 천진스런 모습이 눈에 선하다. 노대통령께서 처음 오셨던 날은 주방까지 들어오셔서 환하게 웃으시며 식당 전 직원에게 악수를 청하셨던 최초의 대통령이셨다. 물론 경호원과 검식관의 태도도 그 전과 완전히 달라져서 부드럽고 협조적이었다.
- 이명박대통령은 취임 직전 2008년 2월 16일 인수위워크숍 때부터 재임기간 장·차관 연찬회, 재원분배워크숍, 재외공관장 워크숍 등 17차례 오셨고, 식사는 약 25회 드셨다. 오실 때 마다 식사를 하셨는데 참 잘 드셨다. 음식을 남기지 않고 다 드셨고, 당시 옷차림도 무척 소탈하셨다. 바닥까지 긁어서 드시기에 음식을 더 드릴까 여쭈어 봤더니, 부족해서가 아니라 남기지 않으려고 그런다며 밝게 웃으셨다.
▲ 만찬 후 조리원들과 악수하시던 이명박대통령(2009년)
- 박근혜대통령은 2015년 8월 13일 국정과제세미나 행사에 기조연설 차 방문하셨으나, 아쉽게도 식사는 하지 않으셨다.
- 가끔 대통령은 무엇을 드시냐는 질문을 받는다. 곰발바닥, 상어지느러미 같은 대단한 것을 드신다는 대답을 기대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어울관에서 역대 대통령들께서 드셨던 메뉴는 실은 평범한 것들이다.
- 【김영삼대통령】 : 보리밥, 도가니우거지탕, 북어찜, 야채무침, 오징어호박전, 깍두기, 과일
- 【김대중대통령】 : 밤기장밥, 호박된장국, 갈치조림, 쇠고기장조림, 섭산적, 고구마순볶음, 북어보푸라기, 더덕구이, 갓김치, 과일
- 【노무현대통령】 : 은행기장밥, 달래두부된장국, 갈치조림, 장조림, 새송이패주복음, 전, 참게장, 김치 2종, 과일
- 【이명박대통령】 : 기장밥, 설렁탕, 코다리찜, 야채지짐, 부추초고추장겉절이, 김치 2종, 과일, 떡
- 결국, 우리 교육생들이 매끼 먹는 메뉴와 큰 차이가 없다.
아찔했던 순간들- 식당위생
- 식당운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철저해야 할 부분이 위생관리다. 1980년도 대전에서 아찔했던 경험이 있었다. 점심메뉴가 닭볶음탕이었는데, 전 날 구입한 닭을 미리 손질하여 냉장고에 넣었다가 다음 날 조리했다. 검식을 위해 닭볶음탕을 먹어 보려고 그릇에 담는 순간 냄새가 확 났다. 보관한 닭에 비해 냉장고 용량이 작아 온도유지가 어려워 변질한 것이다. 일단 조용히(?) 전부 폐기하고 콩나물국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날 메뉴는 부실했지만 사고는 없었다. 상상만 해도 휴~
- 또 이듬해로 기억되는데 세무공무원교육원 교육생 등 20여명이 갑자기 배가 아파서 병원으로 보내졌다. 원인을 규명한 결과, 그 날 먹은 냉면 육수가 냉장고에 넣지 않고 실온에 보관한 것이 문제였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다행히 간단한 치료로 모두 회복됐다.
- 간단한 치료로 모두 회복됐다. 1995년 경 일요일 저녁에 집으로 전화가 왔다. 직원들이 배가 아프고, 설사, 구토를 하며 병원에 입원한 사람도 있는데 원인이 토요일 점심에 식당에서 먹은 자장면인 것 같다며 사고 수습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무척 놀라긴 했으나, 식재료 상태, 조리과정 등을 아무리 역 추적해 봐도 발생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걱정으로 잠을 제대로 못자고 월요일 아침에 출근했다. 발병한 시간, 대상, 증세 등을 조사하고 살펴보니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전 주 금요일에 다른 부서에서 기자재구입 후 고사를 지냈는데, 고사 후에 참석한 직원들이 돼지머리를 나누어 먹은 것이 화근이었다. 3월이라 판매업자들도 변질 위험이 없을 것으로 안심하고 실온에 보관한 게 탈이었다.
- 2003년 봄 월요일에 일어난 일이다. 기숙사에 거주하는 9급실무관리과정 여성 교육생 2명이 배가 아파서 병원에서 입원치료 중인데, 아마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그런 것 같다는 것이다. 부장실에서 대책회의를 하였으나 당사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원인 규명이 어려웠다. 의심스러운 것은 보통 단체급식에서 식중독은 피급식자의 10% 이상이 집단으로 발병하는 것이 상례로, 두 명만 아프다는 사실은 다른 원인일 가능성이 많았다. 더구나 그 날이 월요일이었으므로 일요일에 먹은 음식에서도 원인이 있을 수 있었다. 식당 음식이 원인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병세가 다소 호전되어 기숙사로 돌아 온 교육생들을 만나서 면담하는 중에 원인을 찾아냈다. 두 사람은 같은 방을 쓰고 있었고, 일요일 저녁에 집에서 가져 온 케이크를 방에 두었다가 아침에 같이 나눠먹었다고 했다. 케이크 크림이 밤사이 변질되어 식중독이 발생된 것으로 추정했더니, 본인들과 주위 분들도 수긍을 하여 누명(?)을 벗게 되었다.
- 식중독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간에 한 번 발생하면 건강에 커다란 위해가 된다. 항상 많은 사람들의 음식을 준비하는 업무인지라 한 시도 맘을 놓을 수 없고 늘 긴장하는 부분이다. 위·생·관·리 이 네 글자야말로 식당운영의 최우선순위다.
약식동원(藥食同原), 어울관의 영원한 좌우명!
- 약식동원은 약과 음식은 근원이 같다는 뜻으로, 음식이 곧 약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음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나타내 주는 말로서 재학시절부터 교수님으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다. 젊을 때는 그저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 평소 먹는 음식이 우리 몸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 지 온 몸으로 느끼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중국산을 비롯한 수입 식재료가 시장을 거의 점유하여 건강한 국내산을 사용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첨가제, 안정제, 보존제, 방부제 등 화학물질도 범람하고 있다. TV에서 불량 식재료 뉴스만 봐도 괜히 긴장되곤 한다.
- 이처럼 무엇을 먹을 것인가는 소홀히 할 수 없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이 문제로 매일 고민하고 계획하며 준비한다. 몇 년 전부터 신선하고 건강한 재료를 제공하기 위한 일환으로, 유전자조작하지 않은 사료를 사용한 유정란을 현지구입하고, 항생제 주사하지 않은 친환경오리를 직배송 받는다. 농장에서 직접 길러 건조한 국내산야채를 사용하고, 말린 고사리·곤드레나물 등도 강원도에서 구입하는 등 비교적 안전한 국내산을 공급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한편, 화학조미료의 위해를 줄이기 위해 다시마, 멸치, 무, 양파 등 천연조미료를 사용하고, 정성을 다하여 끓이고, 지지고, 조린다. 적당한 음식 간을 맞추기 위해 몇 번의 간을 보고, 음식의 모양이 으스러지지 않도록 한 가지 음식도 여러 차례 나누어 조리하는 등 정성을 아끼지 않고 있다. 냉동식품 등 완제품은 구입하지 않고 돈까스, 함박스테이크 등도 주방에서 직접 조리하기를 고집한다. 왜냐하면 ‘약식동원’은 우리 어울관의 영원한 좌우명이기 때문이다.
▲ 어울관직원(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