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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웹

국가인재원 속으로

숨겨진 이야기

“크리스마스는 서울에서” - 과천청사 시대로(김능태 전 총무과장)

꼬리 잘린 개

  • 대전청사 시절인 1981년 간부회의 총무과 보고사항 중 간부들의 주된 관심은 ‘언제 서울로 이전하느냐? 는 것 이었다. 대전에서 과천으로 옮기기 직전이었던 만큼 주말이면 등산화를 신고 과천에 가서 과천청사 건축 진도를 점검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크리스마스는 서울에서”라는 목표로 청사 준공에 박차를 가한 결과 12월초에 드디어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인력은 3등분하여 대전에서 싣는 팀, 과천에서 내리는 팀, 트럭과 함께 가는 운송 팀으로 나누었다. 대전에서 동원된 11톤 트럭 10대에 이삿짐을 모두 실은 후 출발신호를 내렸다. 모든 트럭이 시동을 걸고 움직이기 시작하던 순간, 당시 원장이 키우고 있던 애완견이 마구 짖으며 1호차 트럭(당시 1호차에 원장실 집기가 실림) 정면으로 질주했다. 깜짝 놀라 트럭이 급정거를 했지만 그 개의 꼬리가 트럭 뒷바퀴에 끼고 말았다. 조심해서 끄집어내니 꼬리가 반쯤 빠졌다. 개의 위상(?)을 생각해서 급히 병원으로 보내고 이사를 진행시킬 수밖에 없었다. 바쁜 이사 일정으로 인해 그 사실을 잊고 있다가 며칠 후 원장이 ‘내 개 어디 있어 ?’ 하며 개를 찾으셨다. 그때서야 조심스럽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하니, 원장님이 껄껄 웃으면서 “야! 그거 액땜 했다!” 고 하셨다. 과연 그래서였을까. 전 직원을 동원하여 5일간에 걸친 대 수송 끝에 12월 21일 개청식을 가졌는데 작은 사고 하나도 없었다.
  • 이사물품을 실은 트럭
    ▲ 이사물품을 실은 트럭
  • 과천청사 준공식
    ▲ 과천청사 준공식

소나무조경과 운동장 잔디

  • 처음 과천으로 이사를 했을 때 건물만 덜렁 있고 주위는 벌건 황토밭이었다. 단 시일 내 환경을 좋게 할 수 없을 까? 고민하다가 근처에 있는 야생 소나무를 옮겨심기로 하고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니, 소나무는 옮기면 100% 죽는 다고 했다. 그래도 어떻게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했더니 미련스러울지 모르나 분을 크게 떠서 옮겨보라고 했다. 크레인과 직원들을 동원해 정성껏 옮겨 심은 결과 지금과 같은 멋진 소나무 조경이 탄생한 것이다. 소나무 조경 중 기억에 남는 것은 휘호탑 우측의 반송이다. 휘호탑 옆이 허전한 듯 하여 휘호탑에 잘 어울리는 나무를 심기로 하고 백방으로 찾다가 과천청사 서쪽 외딴집에 있는 10년쯤 된 소나무가 눈에 띄었다. 적당히 흥정을 하여 옮기기로 했는데 막상 운반할 트럭이 들어갈 길이 없었다.
  • 과천청사 옆 통신사령부내 작전로를 우선 이용하기로 하고 참모장을 만나 협조를 얻어 트럭으로 소나무를 싣고 경내를 통과하는데, 통신사령부 사령관이 보더니 ‘저거 뭐야?’라고 묻는 것이다. 자초지종 얘기를 들은 사령관은 참모장을 불러 저렇게 좋은 소나무를 왜 국가인재원에 빼앗겼냐며 호되게 꾸지람을 했던 모양이다. 후일 참모장은 통화에서 ‘저녁 한번 얻어먹고 사령관에게 된통 당했다’며 투덜거렸다. 소나무가 그 만큼 좋았다는 방증이다. 운동장 잔디 또한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한겨울에 이사를 하고 다음해 아직 잔디가 뿌리를 내리기 전이었다. 어느 날 육사출신 특채 교육생들이 원장님의 허가를 받아 운동장에서 축구시합을 하는데 잔디가 다 일어나는 것이다. 곧장 원장님에게 보고하고 축구를 하면 안 된다고 하니 총무과장이 알아서 하라고 했다. 방호원들을 비롯한 총무과 직원들을 동원하여 한참 열이 오른 축구시합을 중지시킬 수밖에 없었다. 육사출신 특채 교육생들이 총무과장실로 몰려와서 원장이 허락했는데 총무과장이 왜 막느냐며 시위를 벌였다.
  • 당시는 육사출신 교육생들의 위세는 정말 대단했다. 1 : 60으로 대치하면서 ‘저 잔디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들 후배를 위해 참아라’고 설득 했던 기억이 있다. 돌아가면서 ‘총무과장 지독한 놈!’ 이라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그리 기분 나쁘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과천청사 운동장
▲ 과천청사 운동장

하늘이 돕지 않으면 과정 운영할 수 없어! (최영주 사무관 전 정책교육과 근무)

고위정책과정 외부프로그램 운영

  • 고위정책과정은 원내 프로그램 못지않게 외부진행 프로그램도 중요하다. 외부 프로그램은 입교식 당일의 국립현충원 참배에서부터, 민관합동세미나와 각종 탐방 등 한달에 한번이상 편성되어 있다. 특히 일기상태가 좋지 않으면 과정운영도 어렵지만 교육생 스스로 만족도가 뚝 떨어지기에, 우리원에서는 외부 프로그램의 성공여부가 하늘에 달려있다고 말할 정도다. 보통 12월 말이면 다음연도 탐방 프로그램이 확정된다. 우기나 혹서기 등 평균적인 기상조건들을 고려하지만, 갑자기 하늘에서 내리는 비나 태풍 등의 불규칙한 날씨는 아무리 베테랑 교육자라도 어찌할 수가 없다. 오직 하늘이 도와야만 과정운영이 순조롭게 끝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2006년 연말에 심하게 표현하면 작두를 타는 심정으로 탐방날짜를 선정하였다. 그래서인지 2007년도는 밖에 나가기만 하면 오던 비도 그칠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그해 5월초 울릉도와 독도 탐방 때, 출발 3일 전부터 동해 앞바다의 심한 태풍으로 울릉도행 여객선의 발이 다 묶였다. 이틀 전에도 기상악화로 결항되었고, 하루 전에 해제된 폭풍주의보로 출항했던 배들이 독도 접안을 못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 그야말로 비상사태였다. 하지만 출항당일 거짓말처럼 날씨가 안정되어 울릉도 출항은 물론 독도 접안도 성공하여 눈부시게 아름다운 독도를 볼 수 있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탐방을 마치고 국가인재원으로 돌아온 다음날 동해 앞바다는 또다시 급변하여 울릉도행 배편들이 결항되었다는 사실이다. 6월 중순에 제주도 탐방 때도 출발 3일 전까지 제주 전역에 비가 내렸으나 전날 극적으로 날씨가 풀려 화창한 제주와 한라산을 보고 올 수 있었다. 그해는 국외탐방에서도 비슷한 행운이 따랐다. 7월 초순에 5일여정의 백두산과 고구려유적 탐방 이 있었다. 백두산 천지는 워낙 기상변화가 심해서 맑은 날을 보기가 어렵다는데 맑게 개인 천지를 보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 그런데 하산도중에 천지에 먹구름이 일고 세찬 소나기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이번에도 하늘이 교육생들을 보살피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5일간 탐방일정에 비도 내렸지만 정작 비를 맞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건 실로 행운이었다. 견학이 끝나고 버스에 오르면 비가 왔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여지없이 개이기를 반복했다. 내리는 비를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간절한 마음이 때로는 작은 기적(?)을 가져오기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고위정책과정 21기 울릉도 방문 기념촬영
▲ 고위정책과정 21기 울릉도 방문 기념촬영(‘13.5)
고위정책과정 21기 울릉도 방문 기념촬영
▲ 고위정책과정 19기 백두산 탐방 모습(‘11.8)

국장님들이 족구를 싫어하는 이유

  • 고위정책과정은 강의나 세미나 등 연구 활동이외 연간 70시간 정도 체육활동과 심신단련 시간이 편성되어 있다. 체육활동은 2월 입교하고 한달이 지나면 시작하는데, 단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등산을 많이 하고 그 외 게이트볼, 탁구, 족구, 테니스 같은 구기종목과 승마, 국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
  • 2007년 3월에는 단체가 모두 참석하는 프로그램으로 가볍게 몸을 풀다가, 4월중에 분임별 대항을 가졌는데 고위정책과정은 족구 종목을 선택하였다. 처음엔 즐기는 심정으로 하던 경기가, 갈수록 오기와 경쟁심리가 작용하여 분위기가 과열되어갔다. 마침내 단합보다는 서로 상대를 이겨야 된다는 마음이 앞서게 되었다. 분위기 탓이었을까. 준비운동을 충분히 하고 경기를 했는데도 한 분이 발목 인대 파열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가게 되었다. 부상당한 국장은 평소에 운동도 잘하시고 활동적인 분이라 정말 의외였다. 그날부터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서 3주간 병원치료를 받아야 했고, 이후로도 3개월간 목발에 의지하며 수업을 받았다. 사고 후 그 기수는 졸업할 때까지 체육시간에서 족구가 사라져 버렸다.
  • 그런데 2008년 4월이 되자 어김없이 분임대항 족구시합을 가졌다. 족구가 선택되었을 때, 혹시나 전년도처럼 사고가 나지 않을 까 하는 마음에 충분한 준비운동도 시키고 지난해의 사고 예를 들어 경각심을 고취시켰지만 실은 경기 내내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왜 꼭 들어맞는 것일까? 그해에도 어김없이 한명의 부상자가 생겼고 역시 발목 골절상이었다.
  • 국이 사고를 계기로 교육받는 국장들은 족구의 ‘족’자도 꺼내지 말자는 분위기가 되었다. 당연히 고위정책과정 체육활동에서 족구가 퇴출 1순위 종목으로 급부상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위정책과정 체육활동 모습(족구)
▲ 고위정책과정 체육활동 모습(족구)
고위정책과정 체육활동 모습(국궁)
▲ 고위정책과정 체육활동 모습(국궁)

같이함을 통한 하나됨 (김계중 주무관)

말레이시아공무원 과정 극기훈련

  • 국가인재원에서 근무한 지 25여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84년 이후 거의 매년 실시되는 말레이시아공무원 교육훈련과정의 극기훈련(Orienteering)이다. 그 나라는 산의 대부분이 정글이라 산행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 먼저 거쳐 간 교육생들의 입을 통해 극기훈련을 지옥훈련(?)으로 익히 들어온 관계로, 교육생들은 매년 극기훈련 날이면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새벽같이 일어나 극기훈련을 준비한다.
  • 과천 향교 입구에서 출발하여 관악산 정상까지 오른 후 하산하는 극기훈련 시 마다 교육생들은 다들 굳은 각오로 한 발짝씩 대열을 맞추어 산을 오른다. 하지만 가파르고 힘든 코스로 접어들면 쉽게 지쳐버리곤 하였다. 언젠가 예년처럼 교육생들이 모두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저 만치 앞쪽에서 귀에 익은 노래 소리가 들렸고, 그건 바로 ‘사랑해’ 라는 노래였다.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든 교육생들이 힘차게 합창을 하는 것이 아닌가. 며칠 전에 국가인재원에서 배운 ‘사랑해’가 힘든 순간에 그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고, 피곤함을 잊게 해 주는 피로회복제가 된 것이었다. ‘사랑해’ 라는 노래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얼른 말레이시아 노래 “라싸싸양”이라는 노래를 선창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사랑해와 흡사한 말레이시아의 ‘사랑해’ 노래였는데, “라싸싸양 라싸싸야 싸양해~“ 하고 선창을 하자마자 말레이시아 공무원들이 또 이어서 계속 신나게 합창을 하였고 노래가 거의 끝날 무렵에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 또 어느 때는 하산 시에 말레이시아 여성 공무원 한 명이 약간 경사진 능선 모랫길을 내려오다가 미끄러진 후 두려움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 적이 있었다. 당시 우리 직원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그 경사진 길 아래쪽에 줄지어 서서 말레이시아 여성 공무원이 안심하고 지날 수 있도록 한 적도 있었다. 이렇듯 힘들게 산행을 마치고 나면 말레이시아 공무원들은 동행했던 한국 공무원들에게 ‘힘든 순간 같이하고 도와줘서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우리 직원들도 말레이시아 친구들에게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수고 많았다’는 격려의 인사로 화답하였다. 그것은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극기훈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진한 우정의 확인이었다. 강의장 안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같이함을 통한 하나됨이었다.
64기 말레이시아 과정 중 우중산행(‘12.9)
▲ 64기 말레이시아 과정 중 우중산행(‘12.9)

열정과 자부심의 70년대 새마을교육 (김승택 주무관 전국가인재원 시절 근무)

  • 새마을 교육은 처음 실시된 1974년부터 기존 교육과정의 기간 중 1주를 새마을 교육으로 편성 운영하였다. ‘새마을지도자 중앙교육계획’에 의한 정신계발차원에서 입교한 교육생들은 합숙교육 시 5시 50분 기상과 동시 구보와 아침체조로 일과를 시작했다. 새마을 운동에 동참하는 취지에서 일주일에 한번씩은 대전청사 뒤 마을(현 대전 갈마동과 동촌동)에서 벼 베기, 도랑치기, 낫으로 꼴 베기 등을 하였는데, 일을 마치고 샤워와 식사를 하면 모든 교육생들이 기진맥진 되어 그대로 잠드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 교육에는 독도법을 이용한 산행 극기훈련도 배정되어 있었다. 이 훈련은 나침판 1개와 지도 한 장만을 갖고 지정된 목적지를 찾아가는 방식으로, 오후 1시에 출발을 하여 5개 코스에서 도장을 받고 국가인재원까지 들어와야 비로소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독도법을 모르면 식사는 고사하고 안전사고가 발생가능성이 있어 코스운영에 주의가 요구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번은 한 팀이 귀원시간이 늦도록 도착하지 않아 국가인재원이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서둘러 구호조를 투입하여 행방을 찾아본 결과, 어이없게도 이 교육생들이 산행을 포기하고 태연하게 구멍가게에서 음료와 빵으로 허기를 채우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구호팀이 교육 중인데 이러면 어떻게 하냐고 하자 교육생들이 배가 너무 고파서 그런 것이니 선처를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 난감했지만 배가 고팠다니 원칙대로 하긴 마음에 걸렸다. 일단국가인재원에 복귀하여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교육생들을 구조했다고 보고했다. 그런데,국가인재원에서는 늦은 시간까지 고생한 교육생들을 특별히 배려하여 저녁식사를 따로 마련한 것이다.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그들은 이미 두둑해진 배에다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원치 않는 식사를 또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 교육생들은 정말로 고생을 많이 하였다. 열악한 교육환경과 낙후된 교육기자재를 사용하였지만, 잘사는 조국 건설의 역군으로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한다는 열정만큼은 지금보다 더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새마을 교육노력봉사활동(‘12.9)
▲새마을 교육노력봉사활동

2004년 외국공무원 홈커밍 행사 - 사소한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박문규 주무관)

사소한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 2004년, 외국공무원교육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COTI Alumni! Our lifelong friends and true partners”(COTI 동창생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평생 친구이자 진정한 동반자입니다)이란 슬로건 아래 'COTI Alumni Homecoming' 행사를 개최하였다. 수료생들이 2,000명이 넘어 전 직원들이 동원되어 초청대상자를 국가별, 권역별로 3배수 이상 선정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섭외를 하였다. 당시국가인재원 초청 관련 업무담당자로서 주한외국공관에 직접 찾아가서 수료생 명단을 보여주며 협조를 구했다. 주한 인도대사관에서는 찾고 있던 수료생이 대사로 근무 중이었고, 라오스대사관과 헝가리대사관에서는 찾고 있던 수료생이 직접 면담자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교육생 섭외가 쉽지 않았다. 국제전화로 초청대상자를 섭외 하면, 때론 영어를 전혀 못하는 직원들이 당황하여 서로 수화기를 떠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은 자기들끼리 언성을 높여 떠들다가 전화를 끊는 행위를 수차례 반복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섭외가 지지부진 해 지쳐가고 있을 때였다.
  • 어느 날은 시차관계로 새벽 5시경 과테말라에 연락하여 수차례 통화 끝에 한 여성수료생의 핸드폰 연락처를 알아내어 통화를 시도하였다. 따르릉, 따르릉, ‘Hola’ 흑! 스페인어였다! 그간 중남미 사람들과 수차례 통화를 하면서 배운대로 침착하게 ‘Hola, this is Mr. Park’이라고 응대하며 가볍게 전화한 목적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갑자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Are You Okay?”를 수차례 반복했지만, 그녀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선 계속 울먹였다. 그 후 몇 초가 흐른 후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그 수료생의 목소리가 수화기로 들려왔다. “정말 한국이 맞나요? 정말 COTI가 맞나요?”라고 확인했다. 그렇다고 하자 그는 참았던 울음을 다시 터뜨리고 잠시 후 말문을 열었다. “다시 한국을 찾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는데, 다시 그 아름다운 나라를 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는데,…”라며 울먹였다.
  •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녀는 첫 아기를 출산한 지 두 달 만에 한국여행을 왔고 나중에 아이가 크면 꼭 한국이라는 나라를 보여주러 같이 오겠다고 했을 만큼 우리나라를 사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룰 수 없다가 전화를 받고 비로소 기도가 이루어졌다며 그렇게 기뻐했던 것이다. 내게는 너무나 일상적인 사소한 일도 다른 사람에게 큰 기쁨을 줄 수 도 있다는 사실을 그 때 알았다. 그날 이후 사소한 일을 할 때마다 울먹이던 그 수료생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국제세미나 참석 기념촬영(‘04.7)
▲국제세미나 참석 기념촬영(‘04.7)

과수원에서 잉어 잡던 어느 여름 (홍종의 주무관)

  •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라는 말이 있다. 시각적인 효과의 중요성은 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교육기관들은 경관이 뛰어나고 조용한 곳을 최적의 입지조건으로 삼는다. 하지만 어디를 가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만한 입지 조건은 없는 것 같다. 관악산의 수려한 기슭을 타고 내려 잘 가꿔진 수목들과 어우러지는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조경은 자연미와 인공미의 집합체이다. 처음 방문한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이렇게 좋은 곳에 근무하는 것이 부럽다’라고 말한다. 그만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흘린 직원들의 땀방울과 노력이 맺은 과천 캠퍼스 이전 26년의 결실이기도 하다.
  • 과천 청사 단지와는 별개였던국가인재원은 관악산 기슭에 인접하여 이전 당시만 하더라도 당연히 자연재해의 최전방에 있었다. 조금만 비가와도 축대가 무너지고 부토가 흘러내려 말이 아니었다. 지대 자체가 암반인데다 당시는 이식한 수목들도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로 운동장이나 정원에서 캐낸 돌을 조경석으로 대체해도 남을 정도였다. 특히 쾌적한 캠퍼스 조성과 자연친화적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 전 직원들이 힘을 합쳐 계곡수를 이용한 멋진 연못도 조성했다. 그 곳에 관상용 잉어들을 노닐게 하여 사색할 수 있는 훌륭한 쉼터를 가꾸었다.
  • 1993년인가... 아마도 과천 캠퍼스로 이전한 지 십여 년 쯤 지났을 무렵으로 정확한 일자는 모르지만 여름 장마철이었다. 밤새 폭우가 쏟아져 비상연락을 받고 아침 일찍 출근을 했더니 난리였다. 청사 외곽의 진입로는 산에서 휩쓸려 내려온 토사와 암반들로 뒤덮였고,국가인재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계곡과 직접 인접해 있는 관계로 관악산의 토사와 암반이 연못으로 쏟아져 내려 연못이 거의 매몰된 상태였다. 연못에 있던 물이 미처 배수로로 빠져 나가지 못하고 범람하여 연못 아래에 있었던 과수단지를 쓸어 버렸다. 직원들과 함께 참담한 피해현장을 둘러보며 입을 딱 벌렸다. 과수단지 곳곳에서 잉어들이 온몸으로 살려달라는 듯 펄떡거리고 있었다. 모두들 서둘러 양동이를 가져와 잉어구출작전을 벌였다. 과수단지에서 고기를 잡는 진풍경은 살면서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임시로 마련한 곳에 잉어를 옮겨 살리고 수해피해를 복구했다.
  • 이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진입로 바로 옆의 홍촌천에는 연못에서 떠내려간 잉어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 잉어들이 새끼를 쳐서 지금도 홍촌천에는 물고기들이 노니는 청정한 개울로 인기를 얻고 있다. 요즘은 계곡에 수방시설이 되어 폭우로 인한 자연재해가 없지만, 여름철 폭우가 올 때면 과수원에서 잉어를 잡던 그해 여름의 추억이 생각나서 미소 짓게 한다.
국가인재원(과천) 양어장에서 뛰노는 잉어들
▲국가인재원(과천) 양어장에서 뛰노는 잉어들

단합이 안되는 관상어와 매화나무를 제거하라(김영도 사무관 전 총무과 근무)

  • 19○○년도 어느 해 여름, 양어장을 순시하시던 당시 원장님이 모처럼 양어사료를 주셨는데 대부분 관상어들이 다투듯이 사료를 먹기 위해 모여들었지만 오직 백연어란 어종만 원장님의 뜻을 거슬렀다. 이 어종은 사료를 먹지 않고 프랑크톤만 섭취하며, 놀 때도 고고한 모습으로 다른 어종과 어울리지 않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총무과장님이 심각한 모습으로 오더니 원장님 지시사항을 그대로 전달하는데 ‘단결이 되지 않는(?) 백연어를 물에서 끄집어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 그해 9월초, 다른 수목들은 아직 잎이 성성한데 어울관 앞 화단에 심은 매화 나뭇잎이 일찍 떨어지자 수목들이 단합이 되지 않는다며 매화나무 세 그루를 베어내라는 원장님 지시가 떨어졌다. 매화나무는 일찍 꽃 피고 열매가 맺힌 다음 잎이 일찍 지는 습성이 있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오랫동안국가인재원에서 고락을 함께한 매화나무를 차마 벨 수가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 그냥 두었다. 두 번씩이나 지시사항을 어겼으니 불호령이 떨어질 만도 한데, 다행히 원장님의 주된 관심사가 딴 곳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나중에 총무과장님께 불이행 사실을 보고 드렸더니 빙그레 웃으시기만 하셨다.
  • 원장님의 깊은 뜻을 알기는 어려우나 무엇을 하든 단합과 조화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의도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교직원들이 단합하지 않으면 화목한 조직이 될 수 없고, 책상 앞에 붙어 있는 ‘선진일류국가를 이끌 창의적 인재양성’이라는 올해의 비전도 요원하기만 할 것 같다.
봄이면 국가인재원(과천)을 화려하게 수놓는 수양벚꽃과 매화
▲봄이면 국가인재원(과천)을 화려하게 수놓는 수양벚꽃과 매화

교육원에서 가장 비싼 수목 (김영도 사무관 전 총무과 근무)

  • 교육원에서 가장 비싼 조경수목은 어느 수종이며 값은 어느 정도일까? 교직원과 교육생 중에서 조경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궁금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다. 결론부터 말하면, 가장 비싼 조경수목은 도움관 구름다리와 휘호탑 사이에 식재된 선비송(그림)이다. 이 소나무는 일반적인 수형을 가진 평범한 소나무였으나, 1993년부터 전지작업을 통해 인공적으로 아름다운 수형을 만들어 15년 동안 전지작업, 시비작업, 병해충 방제, 영양제 주입 등 집중 관리하여 현재의 선비송으로 위용을 갖추었으며, 추정가격은 2005년도 대한조경협회에서 감정가격을 1억 5천~2억원으로 추산하였다.
  • 두 번째 비싼 수종은 모과나무이다. 나무의 나이가 300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나무는 보람관 근린화단에 식재되어 있다. 다른 모과나무보다 과육이 단단하고 윤기가 나며 향기가 많이 나는 특징이 있으며, 1983년도에 전북 남원에서 어렵게 구입하여 식재한 수종으로 추정가격은 3천만원 정도이다.
  • 세 번째 비싼 수종은 반송이다. 정문 진입로와 정현관 앞에 식재된 수종으로 반원형으로 수형을 갖추어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조경전문가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는 수종으로, 주당 가격은 2005년도 추정가격 2천만원 정도이다.
  • 그 밖에도 도움관 정문 현관 앞에 식재된 X마스 트리 형상을 한 스트로부스 잣나무 등 감정가격이 1천만원 이상인 수종이 다수 있다. 이들 모두가국가인재원을 과천 최고의 조경으로 소문나도록 한 일등공신들이다.
국가인재원에서 가장 비싼 수목(선비송)
▲국가인재원에서 가장 비싼 수목(선비송)
수령 300년의 모과나무
▲수령 300년의 모과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