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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 위에 그려낸 우리나라 강산의 아름다움

NHI Column · 인물탐구

화폭 위에 그려낸
우리나라 강산의 아름다움

- 시대를 넘어선 예술가, 강세황(姜世晃) -
<표암 강세황 자화상>, 표암 강세황 作 / ⓒWikimedia Commons
걸출한 제자 뒤엔 위대한 스승이 있기 마련이다. 조선 시대 대표 화가로 일컫는 김홍도를
예술의 길로 이끈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곧 그러하다.
식견과 안목이 앞선 데다 시(詩)·서(書)·화(畵)에 능해 일명 삼절(三絶)로 불린 그는 국내는 물론, 멀리 청나라에서
일부러 그림을 청할 만큼 월등한 실력을 자랑했다. 또,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 채색 화법을 수용해 더욱 발전시킨 선구자였다.
<송하맹호도>, 표암 강세황 · 단원 김홍도 作 / ⓒWikimedia Commons
터럭 하나마저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하다.
건듯하니 몸을 펴고 이쪽을 보는 호랑이의 형형한 눈빛에서 드러나는 기상이 호방하기 그지없다.
그 위로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소나무의 멋스러운 가지 한 줄기가 고즈넉한 여유를 더한다.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는 스승과 제자의 솜씨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수작이다.
온몸에서 용맹한 기운을 뿜어내는 호랑이를 그린 김홍도의 재주도 놀랍지만, 소나무의 너그러운 심성을 충분히 표현해
그림의 가치를 한 단계 끌어올린 강세황의 붓끝은 과연 감탄을 자아낸다. 사제 간을 떠나 예술가로 아랫사람을
존중한 강세황의 현명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문인으로 첫발을 내디뎌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의 영광을 이루다
<삼세기영지가>, 추사 김정희 / ⓒ국립중앙박물관
1713년 한양에서 태어난 강세황은 대대로 명성을 떨친 사대부 집안에서 성장했다. 김홍도의 스승으로 워낙 널리 알려져 화가라고 여기는 시선이 적지 않은데, 진정한 바탕은 문인이다. 처가가 있는 안산에서 거주하며 30년간 학문과 서화에 몰두해 지내다가 1773년 영릉참봉을 시작으로 느지막이 벼슬길에 올랐다.

나랏일을 성실히 수행한 덕분에 2년 뒤엔 한성부 판관에 올랐고, 1776년 드디어 기로정시 갑과에서 장원급제하면서 관운이 트였다. 그 후 한성부 우윤·좌윤과 호조참판, 병조참판 등을 거쳐 1783년엔 지금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받았는데 훗날 두 차례(1785·1789년)에 재차 같은 자리를 맡을 정도로 행정에 탁월했다고 전해진다.

재능 못지않게 효성이 지극했다는 그는 71세에 기로소(耆老所, 70세 넘는 정2품 이상 관리 예우 기구)에 들어가 삼대째 달성한 영광이라는 의미의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를 이뤘다. 조상의 가르침을 받들어 학문에 정진하길 게을리하지 않은 끝에 얻은 성과였다.
진경산수화를 확산하고 서양 채색 화법을 자유로이 받아들인 당대의 거장
<송도기행첩>, 표암 강세황 作 / ⓒWikimedia Commons
본연의 임무와는 별개로, 글씨와 서화에 능해 따르는 이가 많았다. 화풍은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로 유명한 겸재 정선(鄭敾)을 계승했으며, 직접 그리고 평가하는 작업 외에 후대 작가 후원에 앞장서길 마다치 않았다.

또, 당시 선비들의 사랑을 받은 산수화나 사군자 작품에 밀려서 별로 인정받지 못했던 풍속화와 인물화를 유행시켰다. 그 영향을 받은 김홍도가 소박한 서민의 삶과 일상을 화폭에 남겨 전했으니 후대로서는 매우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더불어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확산에 힘썼다. 이전까진 중국의 산세를 상상해 그리거나 이미 현존하는 작품을 따라 그리는 데 그쳤다면, 이는 우리나라 강산만이 가진 특유의 정서와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방식이기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1784년 천추부사로 중국 연경에 가면서 강세황의 예술 세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수묵(水墨)과 담채(淡彩)를 활용해 내면의 정신을 그리는 남종화를 익힌 계기로 작용한 까닭이다. 그러나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보다는 우리 미적 감각에 걸맞게 성립해 심사정, 김윤겸 등 당대의 화가가 열성적으로 따랐다.

덧붙여 서양의 채색 화법을 배척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에 자유로이 녹여내 칭송받았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시대를 넘어선 예술에 가까이 다가선 그를 아끼는 이는 적지 않았다. 청나라 사신 시절엔 그림을 받기 위한 인파가 줄을 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세대를 넘어 멈추지 않는 붓끝으로 이어진 예술혼
표암 강세황의 묘소와 신도비 / ⓒ문화재청
현재 충북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에 잠들어 있는 강세황의 흔적을 찾는 발길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곳에서 서화와 더불어 말년을 보낸 자취를 따라왔을 테다.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의 생애는 충청북도 문화재 자료 83호로 지정한 묘소와 신도비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또, 지난 2018년부터 진천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에서 <표암 강세황 미술대전>을 주최해 차세대 미술계를 열어나갈 신진 작가를 발굴하고 있다. 순백의 화폭 위에 아름다움을 창조해낸 얼을 기리기 위해서다. 그러니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의 붓끝은 멈추지 않는다. 다음 세대의 손을 빌려 언제까지나 대한민국 예술 문화와 뜻을 같이할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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